도고시긴자 상가에 도착해
도고시 긴자 상점가 개요
도고시 긴자 상점가 연합회(이하 도고시 긴자 상점가)는 도큐 이케가미 선 「도고시 긴자 역」에 접한 총 길이 약 1.3km에 걸친 간토 유수의 규모를 자랑하는 상점가로, 도고시 긴자 상영회 상점가 진흥 조합, 도고시 긴자 상점가 진흥 조합, 도고시 긴자 긴로쿠 상점가 진흥 조합 등 3개 상점가 진흥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점가를 따라 약 400개 점포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신선 3품(청과, 정육, 생선)을 취급하는 가게도 다수 남아 있는 식료품 및 일용품을 중심으로 한 근린형 상점가입니다.
다이쇼 12년(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도쿄 서민 동네 및 요코하마 방면 상인들이 당시 발전이 두드러지던 오사키 주변 공장 지대인 이곳에서 활로를 발견하여 모여들고, 쇼와 2년(1927년)에 도큐 이케가미 선 「도고시 긴자 역」이 개업하며 그때까지 산재해 있던 주변 상점들이 역을 중심으로 모이면서 지금의 도고시 긴자 상점가의 시초가 된 상업 집적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도큐 이케가미 선 이외에도 도보권에 도에이 아사쿠사 도고시 역, JR 오사키 역, 도큐 오이마치 선 도고시코엔 역이 있어 교통 편리성이 대단히 높은 지역으로, 귀가 도중 쇼핑하는 사람들로 인해 가로등이 밝아 안심할 수 있다는 이유도 한몫하며 살고 싶은 동네 랭킹에도 자주 오르는 등 거주지로도 상당히 인기가 있습니다.
고도 경제 성장기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번성했던 도고시 긴자이지만, 버블 붕괴 직후에는 통행량이 매우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3개 상점가가 협력하여 다양한 활성화 사업을 펼쳐온 결과 평일 통행량 1만 명을 넘겼으며 근래의 통행량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의 상점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상점가 브랜드 및 점포별 일품 사업의 시초인 「도고시 긴자 브랜드 사업」과 산학 제휴 성공 사례로 주목 받는 「도고시 긴자 크로켓 프로모션 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상점가 활성화 사업이 호평 받아 헤이세이 21년(2009년) 6월에 간행된 중소기업청 「신 간바루 상점가 77선」에 게재된 것 외에도 도쿄 판매사 협회와 닛케이 신문이 공동 주최한 헤이세이 24년도(2012년도) 「제13회 에네르기시 타운상(메구로 구・시나가와 구의 142개 상점가가 심사 대상)」 대상을 수상하는 등 전국적으로 주목 받는 상점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고시 긴자 상점가는 서민 동네 정서가 흘러넘치는 상점가로 미디어 등으로부터 주목도가 상당히 높으며, B급 구루메(싸고 맛있는 음식)와 서민 동네 맛집 유행의 흐름을 탄 「도고시 긴자 크로켓」 프로모션을 계기로 「찾아 돌아다니며 먹는 거리」, 「서민 동네 맛집 촬영의 성지」로 불리며 잡지와 텔레비전에서 다수 소개되어 전국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아졌습니다.
요즘은 여행사가 상점가 투어를 끼고 관광객을 데려오는데, 특히 주말 및 공휴일에는 멀리서 쇼핑 목적뿐만 아니라 상점가 자체에 놀러 오는 관광을 목적으로 한 방문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도고시 긴자」라는 지명의 유래
도고시 긴자 상점가를 서쪽 방향으로 걸어가면 나카하라카이도라는 오래된 가도에 다다릅니다. 중세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길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가도를 지나 에도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도고시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에도(江戸, ‘도쿄’의 옛 이름)에서 출발해 지금의 도고시를 지나면 사가미 국(가나가와 현의 대부분)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과거 이 땅을 「에도 고에(‘넘어’라는 의미) 마을」이라 불렀다가 머지 않아 「도고시(戸越)」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도고시의 수호신을 모신 「도고시 하치만 신사」 경내에는 홀연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조주안의 인기를 노래한 「에도를 넘어 시미즈 위 조주안 소원의 실 풀리지 않는 날은 없으니」를 새긴 비석이 있습니다.
조주안은 도고시 하치만 신사의 기원이 된 초가집으로, 히라쓰카에 있는 잇폰스기모토 하치만구가 그 흔적이라고 전해집니다. 그 밖에도 노래에 나오는 「시미즈 위」에서 유래한 「시미즈자카」라는 지명이 현존, 옛 노래가 지금도 고장에서 구전되고 있습니다.
또한 도고시 긴자 주변에는 「시미즈자카」 외에도 「미야마에자카」, 「하치만자카」, 「미쓰이자카」, 「헤이와자카」와 같이 자카(坂, 비탈)가 붙는 지명이 많습니다. 상점가는 이 비탈을 내려간 곳에 동서로 펼쳐진 골짜기 밑바닥 모양의 지형을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물 빠짐이 아주 나빠 오랜 시간 진창과 침수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당시 상점주들이 다이쇼 12년(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긴자의 벽돌 건물 거리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 벽돌 잔해 처분에 곤란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는 그 벽돌을 물 빠짐이 나쁜 길에 깔아 걷기 좋게 만들자며 긴자까지 리어카를 끌고 벽돌을 받으러 갔다고 합니다. 도고시 긴자 상점가의 가장 동편에 위치한 도고시 긴자 긴로쿠 상점가 진흥 조합은 벽돌을 받으러 갔던 장소가 긴자 6초메였던 것에서 긴로쿠 상점가 태반이 당시 히가시토고시, 도고시라는 지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자 6초메 상점가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 제일의 상업지였던 본가 「긴자」에서 벽돌을 양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융성한 긴자의 기운을 닮고 싶다는 생각에서 「도고시」와 「긴자」를 이어 「도고시 긴자」라 명명했던 것을 시작으로 봅니다. 도고시 긴자는 전국에 300개 이상 있다고 전해지는 「○○ 긴자」의 원조라 불리는데, 긴자 본가와의 인연으로 탄생한 혈통 있는 「덕을 입은 긴자」랍니다.
도고시와 긴자의 관계
메이지 5년(1872년) 긴자 대화재로 긴자 및 쓰키지 일대가 소실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대규모 화재 대책으로 건물 불연화를 추진하여 긴자 거리를 서구풍 벽돌 건물로 바꿔나갔습니다. 그때 벽돌 제조원 가운데 시나가와 시로렌가 주식회사가 있었습니다. 시나가와 구에 회사가 있었던 인연으로 그 창업자인 니시무라 가쓰조 씨가 당시 물 빠짐이 나쁜 도고시 긴자의 고민을 전해 듣고 재해로 발생한 긴자의 벽돌 잔해 처리 문제와 결부시켜 그 벽돌을 상점가 거리에 깔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왔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긴자로부터 벽돌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속도랑 배수 대공사
지금은 전선류가 땅속에 묻혀 걷기 좋고 아름다운 최신 가로가 되었지만, 속도랑 배수(하수) 대공사가 쇼와 30년대(1955~1964) 중반에 시행되기 전까지는 도랑에서 흘러넘치는 물이 상점가 사람들의 최대 고민이었다고 합니다.